만세운동은 사회주의 계열에서 주도한 운동이 아니라 ‘민족주의’적 학생운동으로 변질되어 갔다. 즉, 사회주의 계열이 추진한 6.10만세운동 계획은 사전에 발각 되어 거사를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이 운동의 범주에서 제외시키고 거사에 성공한 학생 시위만을 6.10 만세운동으로 꾸며 나갔던 것이다
민족 해방만세!
위의 격문은 학생투쟁 지도부에서 장재성이 쓴 격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광주학생운동이라는 지역적 명칭 때문에 광주지방만의 운동으로 인식해 온 경향이 있다. 이는 지난 50년간의 세월이 지나면서 더욱 더 굳어지게 되었다. 광주학생운동이 광주 학생들에 의해 먼저 투쟁의
운동의 발전 양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이들 비밀결사는 대부분이 임시정부 지원을 표방하고 있었다. 3․1운동의 열기를 모아 전국 규모로 조직을 세워 갔던 이들 비밀결사는 임시정부 지원을 내세우며 각 단체간의 통합과 연합을 모색하면서 독립운동의 민족적 기반을 넓혀 갔다. 대한독립애국
운동의 주도권을 놓고 서로 대립했다.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 대오는 흩어지고 말았다.
이와 같은 공황 속에서도 노동쟁의•소작쟁의•학생운동•사상운동 등 일련의 항일투쟁은 꾸준히 전개되었고, 이 시기에 국내에서는 3 •1운동 이래 최대의 6•10 만세 사건(1926년)과 광주